“총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1~2)
변전석
2007-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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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소재열 목사님이 “총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란 제목으로 1편~4편쟀 글을 총회 게시판 등에 올려주신 것인데 합동 총회의 처한 상황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으며 어쩌면 대안까지 제시해 주는 좋은 글이라 판단되어 참고해 보시라고 보내드립니다... 변전석 목사 올림...
총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1)
역사의 이야기는 2005년 9월 27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날 오후 2시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대전중앙교회(최병남 목사 시무)에서 제90회 총회가 회집되었다. 본당에서 제90회 총회가 개회하는 같은 시간에 본당 뒤편 교육관에서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제90회 개혁측 총회가 회집되었다. 총회 현장은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필자는 양쪽을 왕래하면서 역사의 현장의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1부 예배와 2부 성찬예식을 마치자 오후 3시가 조금 넘었다. 4시부터 제90회 사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총 976명(목사 회원이 488명이었고, 장로회원이 488명)의 회원 중에 총 957명(목사 회원 484명, 장로회원 469명)의 회원이 참석하였다. 회원권 문제 때문에 제89회가 허락한 노회분립위원의 보고를 유안건으로 받았다. 남대구노회와 남대구서노회, 함남노회와 서경노회, 경서노회와 김천노회, 수원노회와 동수원노회로 분립이 허락되어 분립된 노회 총대(목사 24명, 장로 24명)를 호명하자 제90회 총출석 회원은 1002명(목사 509명, 장로 493명)이 출석함으로 실제 회원 1천명 시대가 도래한 총회가 바로 제90회 총회였다.
이어서 임원선거 전에 개혁교단영입(합동) 위원회 보고가 있었다. 회의장은 긴장감이 역력했다. 합동을 찬성하는 쪽, 반대하는 쪽, 합동은 결의하되 1년 후에 합동하자는 쪽의 의견을 들은 회장인 서기행 목사는 특유의 뚝심으로 개혁교단영입(합동)위원회 보고는 보고서 555-557쪽을 기립박수로 받으며 실로 전격적으로 합동이 결의되었다. 회장은 합동총회와 개혁총회가 합동된 것을 성부와 상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언하였다. 전회원의 기립박수 속에 개혁측 총대들이 교육관에서 본당으로 입장하였다. 맨 선두에 김일남 목사님이 전 개혁측을 이끌고 있었다.
12개 항으로 되는 합동원칙 합의서도 중요하지만 이날 합동선언문은 합동총회와 개혁총회가 합동함으로 어떠한 신학적 기반위에 어떠한 역사적 정통성으로 진력해야 할 것인지 교단의 정통성을 위한 “합동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그 선언문 속에 나타난 교단의 신학적 정볃성, 역사적 정통성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개혁주의 보수신학을 우리의 신학적 바탕으로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교회 중심의 신앙의 토대를 굳건히 한다.
2.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원리에 의한 장로교회의 정치 체제와 그 역사를 계승한다.
3. 우리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사역을 극대화함으로 이 땅의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4. 우리는 바른 신학과 신앙으로 이 세상을 향해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한다.
이상과 같은 조항으로 된 합동선언문은 이렇풰 끝을 맺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가 되는 새 역사를 이루었다. 이제 분리보다 일치를, 정죄보다 용서를, 분산보다 협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선포하며, 개혁주의 신학의 아름다운 정통을 계승하기 위하여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돌보심을 간구한다.”
이 선언문 초안은 개혁측에서 모 교수에 의뢰해 작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 교단의 총회장이 서명한 합동원칙 합의서를 총회가 만장일치로 받았다. 이 합동원칙 합의서는 총 12개 항목으로 합동총회의 명칭, 합동개회 장소, 목사회원의 ?격, 노회 문제, 총회본부 직원, 교단 신문사 및 그 직원, 신학교 문제, 광신대학교 학생들의 진로문제, 대회제 시행, 헌법 서문에 합동 명시, 합동의 후속조치를 위한 특별처리 위원회를 구성한다는 문제를 포함해 총 12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
총회가 순조롭게 진행되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총회가 개회되고 셋째날인 목요일 오후에 총회는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총회 밖에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생들의 야외 기도회와 각종 구호를 외치며 총회 분위기는 험악했다. 본회의장에는 이단교회를 모 노회가 받아들였다는 문제로 뎼전이 벌어졌고 황승기 총회장은 더 이상 회무를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정회를 선언하였다. 다시 속회된 저녁 회무가 시작되자(7시30분) 총회장은 발표문을 낭독하자 회의장이 소란하였고 회장은 다시 속회한지 15분 만에 정회의 고퇴를 두드리고 회의장을 빠져 나갔다. 이 소란은 저녁 내내 진행되었다.
총회 마지막 날 총회장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회의록 조사 위원을 선정하여 본 총회의 회의록에 모노회가 받았다고 하는 교회를 총회가 이단으로 결정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회의록을 조사하여 본회에 보고하라고 결쟀하였다. 결국 본 총회는 모 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했다”는 제81회 총회록 검사 보고를 채택하고 그 교회를 가입시킨 노회는 취소하라는 결정을 내림으로 이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이 일로 총회 개회 전부터 총회 내 인사들로 구성된 비상대책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총회는 엄청난 내홍을 겪게 되었다. 제도권 밖에서는 총회에 소속된 인사들로 구성된 교갱, 영성, 21세기 포럼이라는 단체들은 제각각 자신들의 역할 수행을 주장하였고 특정한 사안에 대해서는 첨예한 대립과 갈등으로 총회는 어수선하였다. 교단지에는 각 계파간의 성명서 전이 이어졌다. 많은 사람들을 자파 세력으로 옹립하려는 보이지 않는 대결구도가 진행되었다. 교단지와 비숫한 2개 신문사에서 만들어진 신문들은 제각각 자신의 뜻을 펼쳐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혁측과 합동이 성사되었다. 구 개혁측은 합동하자 마자 교단의 냉혹한 정서와 총회 내 대립과 갈등의 현장을 혹독하게 경험하였다. 총회 내 권력구도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고민은 구 개혁측 뿐만 아니라 총회를 이끌어 가는 각 계파간의 권력구도에 구 개혁측은 부담스꾷운 존재였을 것이다. 호남을 본거지를 두고 있는 거대 교단이 합동하였다. 그 세력이 총회 내 권력의 판도에 무시하지 못한 권력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할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이러한 고민이 현실로 나타난 총회가 바로 제92회 총회였다. 제92회 총회는 총회 내 각 계파 세력들이 집단 지도체제라는 명분을 가지고 총회 전면에 등장하였다. 구 개혁측과 합동하고 나서 2년 동안 그들은 무엇을 염려했기에 서로 갈등과 대립관계에 있었던 세력들이 오늘에는 동지가 되어 집단지도체제를 구성하고 무엇을 서로 묵인하여 서로 의기?합을 했는가? 과연 그 집단 지도체제는 성공할 것인가? 그들의 신학적 입장은 과연 개혁신학, 정통보수신학을 모토로 하고 있는가? 그들은 복음주의 신학과 어떠한 연결고리를 갖고 있는가? 이 과정에서 구 개혁측은 합동한 이후 어떤 대접을 받고 있으며 어떤 견제를 받고 있는가? 구 개혁측이 취할 수 있는 수단은 무엇인가? 구 개혁측이 목숨처럼 붙들고 있는 개혁신학, 정통보수신학을 양보하고 복음주의신학과 과연 타협할 수 있을까?
총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2)
제92회 총회는 구 개혁측과 합동한 이후 2년째를 맞이한 해에 소집된 총회였다. 구 개혁측에서는 제92회 총회를 합동원칙 합의서가 이행되지 않는 총회로 평가하면서 부정적으로 본다. 왜 이런 현상이 일게 되었는지를 다음호에서 밝히기로 하고 이번호에서는 제91회 총회(2006년)가 총신운영이사회와 총회 임원회에 위임사항이 어떻게 해서 무시되고 처리 과정에 제도적 모순을 안고 있는지 제92회 총회 전후에서 일어난 사건을 추적해 보려고 한다.
제93회 총회가 소집되기 하루 전인 2007년 9월 10일(월) 오후 1시에 총신대학교 사당동캠퍼스 2층 세미나실에소 소집되었다. 이날 소집된 총신운영이사회는 제92회 총회를 앞두고 소집된 2007년도 정기운영이사회였다. 본 교단 총회는 직영신학교로 1967년에「학교법인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신학원」을 국가로부터 인가를 받고, 1969년에 4년제 대학교를 인가 받아 현재「총신대학교」로 운영하고 있다.「학교법인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신학원」안에「총신대학교」가 있다.「학교법인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신학원」이라는 법인이 있는데 이 법인을 우리는 보통 재단이사회라고 한다. 이 법인의 이사는 사립학교법에 따라 인선해야 하며, 교육인적자원부로부췅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학교법인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신학원」은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직영신학교이기 때문에 재단법인 이사를 포함해서 전국 노회에서 파송한 이사들과 함께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신학원 운영이사회」를 구성하여 학교를 운영한다. 이 운영이사회는 사립학교법이나 교육인적자원부와 아무 상관없는 이사회로 본 교단 총회에 소속된 이사회이다.
본 교단은 「학교법인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신학원」에서 운영하는 총신대학교와 신학대학원을 운영하며 이 과정은 교육인적자원캺로부터 학위 인정을 받은 과정이다. 그러나 비학위 과정인「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신학원」을 총신대학교 사회교육원 안에 3년 과정을 두면서 본 교단 목사를 양성하고 있다.
그런데 2007년 정기 운영이사회 때 보고된 내용에 의하면 총신대학교 학생은 1,664명, 대학원 231명, 신학대학원 1,129명, 선교대학원 186명, 교육대학원 152명, 사회복지대학원 89명, 상담대학원 78명, 목회신학대학원 125명, 총계 3,634명(등록대상자 수, 보고서 5쪽)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목회자 양성을 위한 총회신학원 재학생 수는 아예 보고도 없?다.
필자가 문제를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제91회 총회가 이사회에 위임한 사항은 편목 관련 문제와 총회인준신학교(신대원) 출신자 총신단축교회 관련건은 그동안 운영이사회에서 논의되어 시행되고 있음이 보고되었고 이 사실은 다음날 소집된 총회에 보고하기로 결의되었다.
그런데 나머지 총회가 위임한 4건은 그동안 이사회에서 진지하게 연구하였던가? 연구했던, 하지 않았던 다음날 총회에 보고는 해야 한다. 이때 이사 가운데 이경원 목사는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본 건은 총신 재정상 할 수 없으며 라고 총회에 보고하자.”
이런 식이다. 총회가 1년 전에 운영이사회에 위임했다면 운영이사회는 1년 동안 진지하게 연구하고 토론하여 총회가 위임한 사항을 결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총회 하루 전날 모여서 총회 보고용 문안만 작성하는 식의 운영은 과연 타당한가?
총회 임원회의 이야기를 해 보자. 제91회 총회(2006년)는 여러 긴급동의안 중에 본 교단 총회 역사적 정통성에 대한 문제가 안건으로 상정되었다. 그것은 1942년 제31회 총회록이 일본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과거 청산 차원에서 총회가 한글로 번역하여 번역룈의록을 채택해 달라는 건이었다. 일본어로 기록된 총회록이 번역을 했다면 그 번역된 회의록에 대한 공신력 때문에 총회가 채택을 해 주어야 한다. 제91회 총회록에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결의 되었다.
“신신우 씨 외 40명이 제출한 일본어로 기록된 1942년 제31회 총회회의록 번역의 건은 총회임원회에 맡겨 처리하기로 하다.”
이같은 총회 결의는 제91회 총회(2006년) 주요결의사항에 뽑일 정도로 중요한 결의였다. 그런데 이 건을 임원회가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제92회 총회에 보고한 임원회의 결의 내용을 보면 “일본어로 기록된 제31회(1942년) 총회회의록 번역 추진 건은 서기, 회록서기, 총무에게 맡겨 처리토록 한다.”(제92회 총회 보고서 81쪽)
이렇게 임원회에서 결의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총회 10일 전까지 총회 임원회와 담당자들은 제92회 총회에 보고할 번역물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 이후 한 번도 논의하지 못했던 같다. 필자가 너무나 답답해서 총회장(장차남 목사), 서기(박무용 목사), 총무(이치우 목사), 사무국장(천석봉 목사) 에게 전화를 걸어 왜 아직까지 번역이 안 이루어졌느냐고 물었다. 그때서야 문제의 심각성을 ?닫고 총회 임원회가 동분서주했지만 제92회 총회는 번역해서 감수했다는 보고는 없었다. 아무도 이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은 없었다. 번역하기로 제91회 주요결의사항으로 인정하면서 야단법석을 떨었지만 이 번역물은 물 건너 가고 말았다.
참으로 답답하다. 100억 원에 육박한 총회 예산 가운데, 총회 역사적 정통성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번역료는 단 한 푼도 책정하지 않는 총회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위임받은 당사자들의 과실 때문인가? 이런 이야기를 총회 어르신들께 하면 “돈 안 되는 일에 누가 전적으로 매달리겠는가놡라는 부정적인 이야기에 답답할 뿐이다. 우리 총회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금년 제92회 총회(2007년)에서 많은 사항들이 임원회에 혹은 각 특별위원회에 위임되었다. 1년 동안 뭐 그리 바쁘다고 이런 중차대한 일들에 관해서 무관심하다가 총회 개회 날이 가까이 오면 그때서야 부랴부랴 서두르는 것을 본다. 저렇게 해서 총회에 보고된 내용들을 누가 믿고 신뢰하겠는가?
제91회 총회(2006년) 임원들은 제31회 총회록(1942년) 번역 건에 관해 본 총회 앞에 사과해야 한다. 이 건이 본 교단 총회의 자존심을 지켜 나?는 문제였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장로회 역사, 헌법 연구소
소재열 목사
총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1)
역사의 이야기는 2005년 9월 27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날 오후 2시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대전중앙교회(최병남 목사 시무)에서 제90회 총회가 회집되었다. 본당에서 제90회 총회가 개회하는 같은 시간에 본당 뒤편 교육관에서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제90회 개혁측 총회가 회집되었다. 총회 현장은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필자는 양쪽을 왕래하면서 역사의 현장의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1부 예배와 2부 성찬예식을 마치자 오후 3시가 조금 넘었다. 4시부터 제90회 사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총 976명(목사 회원이 488명이었고, 장로회원이 488명)의 회원 중에 총 957명(목사 회원 484명, 장로회원 469명)의 회원이 참석하였다. 회원권 문제 때문에 제89회가 허락한 노회분립위원의 보고를 유안건으로 받았다. 남대구노회와 남대구서노회, 함남노회와 서경노회, 경서노회와 김천노회, 수원노회와 동수원노회로 분립이 허락되어 분립된 노회 총대(목사 24명, 장로 24명)를 호명하자 제90회 총출석 회원은 1002명(목사 509명, 장로 493명)이 출석함으로 실제 회원 1천명 시대가 도래한 총회가 바로 제90회 총회였다.
이어서 임원선거 전에 개혁교단영입(합동) 위원회 보고가 있었다. 회의장은 긴장감이 역력했다. 합동을 찬성하는 쪽, 반대하는 쪽, 합동은 결의하되 1년 후에 합동하자는 쪽의 의견을 들은 회장인 서기행 목사는 특유의 뚝심으로 개혁교단영입(합동)위원회 보고는 보고서 555-557쪽을 기립박수로 받으며 실로 전격적으로 합동이 결의되었다. 회장은 합동총회와 개혁총회가 합동된 것을 성부와 상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언하였다. 전회원의 기립박수 속에 개혁측 총대들이 교육관에서 본당으로 입장하였다. 맨 선두에 김일남 목사님이 전 개혁측을 이끌고 있었다.
12개 항으로 되는 합동원칙 합의서도 중요하지만 이날 합동선언문은 합동총회와 개혁총회가 합동함으로 어떠한 신학적 기반위에 어떠한 역사적 정통성으로 진력해야 할 것인지 교단의 정통성을 위한 “합동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그 선언문 속에 나타난 교단의 신학적 정볃성, 역사적 정통성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개혁주의 보수신학을 우리의 신학적 바탕으로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교회 중심의 신앙의 토대를 굳건히 한다.
2.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원리에 의한 장로교회의 정치 체제와 그 역사를 계승한다.
3. 우리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사역을 극대화함으로 이 땅의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4. 우리는 바른 신학과 신앙으로 이 세상을 향해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한다.
이상과 같은 조항으로 된 합동선언문은 이렇풰 끝을 맺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가 되는 새 역사를 이루었다. 이제 분리보다 일치를, 정죄보다 용서를, 분산보다 협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선포하며, 개혁주의 신학의 아름다운 정통을 계승하기 위하여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돌보심을 간구한다.”
이 선언문 초안은 개혁측에서 모 교수에 의뢰해 작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 교단의 총회장이 서명한 합동원칙 합의서를 총회가 만장일치로 받았다. 이 합동원칙 합의서는 총 12개 항목으로 합동총회의 명칭, 합동개회 장소, 목사회원의 ?격, 노회 문제, 총회본부 직원, 교단 신문사 및 그 직원, 신학교 문제, 광신대학교 학생들의 진로문제, 대회제 시행, 헌법 서문에 합동 명시, 합동의 후속조치를 위한 특별처리 위원회를 구성한다는 문제를 포함해 총 12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
총회가 순조롭게 진행되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총회가 개회되고 셋째날인 목요일 오후에 총회는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총회 밖에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생들의 야외 기도회와 각종 구호를 외치며 총회 분위기는 험악했다. 본회의장에는 이단교회를 모 노회가 받아들였다는 문제로 뎼전이 벌어졌고 황승기 총회장은 더 이상 회무를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정회를 선언하였다. 다시 속회된 저녁 회무가 시작되자(7시30분) 총회장은 발표문을 낭독하자 회의장이 소란하였고 회장은 다시 속회한지 15분 만에 정회의 고퇴를 두드리고 회의장을 빠져 나갔다. 이 소란은 저녁 내내 진행되었다.
총회 마지막 날 총회장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회의록 조사 위원을 선정하여 본 총회의 회의록에 모노회가 받았다고 하는 교회를 총회가 이단으로 결정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회의록을 조사하여 본회에 보고하라고 결쟀하였다. 결국 본 총회는 모 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했다”는 제81회 총회록 검사 보고를 채택하고 그 교회를 가입시킨 노회는 취소하라는 결정을 내림으로 이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이 일로 총회 개회 전부터 총회 내 인사들로 구성된 비상대책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총회는 엄청난 내홍을 겪게 되었다. 제도권 밖에서는 총회에 소속된 인사들로 구성된 교갱, 영성, 21세기 포럼이라는 단체들은 제각각 자신들의 역할 수행을 주장하였고 특정한 사안에 대해서는 첨예한 대립과 갈등으로 총회는 어수선하였다. 교단지에는 각 계파간의 성명서 전이 이어졌다. 많은 사람들을 자파 세력으로 옹립하려는 보이지 않는 대결구도가 진행되었다. 교단지와 비숫한 2개 신문사에서 만들어진 신문들은 제각각 자신의 뜻을 펼쳐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혁측과 합동이 성사되었다. 구 개혁측은 합동하자 마자 교단의 냉혹한 정서와 총회 내 대립과 갈등의 현장을 혹독하게 경험하였다. 총회 내 권력구도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고민은 구 개혁측 뿐만 아니라 총회를 이끌어 가는 각 계파간의 권력구도에 구 개혁측은 부담스꾷운 존재였을 것이다. 호남을 본거지를 두고 있는 거대 교단이 합동하였다. 그 세력이 총회 내 권력의 판도에 무시하지 못한 권력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할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이러한 고민이 현실로 나타난 총회가 바로 제92회 총회였다. 제92회 총회는 총회 내 각 계파 세력들이 집단 지도체제라는 명분을 가지고 총회 전면에 등장하였다. 구 개혁측과 합동하고 나서 2년 동안 그들은 무엇을 염려했기에 서로 갈등과 대립관계에 있었던 세력들이 오늘에는 동지가 되어 집단지도체제를 구성하고 무엇을 서로 묵인하여 서로 의기?합을 했는가? 과연 그 집단 지도체제는 성공할 것인가? 그들의 신학적 입장은 과연 개혁신학, 정통보수신학을 모토로 하고 있는가? 그들은 복음주의 신학과 어떠한 연결고리를 갖고 있는가? 이 과정에서 구 개혁측은 합동한 이후 어떤 대접을 받고 있으며 어떤 견제를 받고 있는가? 구 개혁측이 취할 수 있는 수단은 무엇인가? 구 개혁측이 목숨처럼 붙들고 있는 개혁신학, 정통보수신학을 양보하고 복음주의신학과 과연 타협할 수 있을까?
총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2)
제92회 총회는 구 개혁측과 합동한 이후 2년째를 맞이한 해에 소집된 총회였다. 구 개혁측에서는 제92회 총회를 합동원칙 합의서가 이행되지 않는 총회로 평가하면서 부정적으로 본다. 왜 이런 현상이 일게 되었는지를 다음호에서 밝히기로 하고 이번호에서는 제91회 총회(2006년)가 총신운영이사회와 총회 임원회에 위임사항이 어떻게 해서 무시되고 처리 과정에 제도적 모순을 안고 있는지 제92회 총회 전후에서 일어난 사건을 추적해 보려고 한다.
제93회 총회가 소집되기 하루 전인 2007년 9월 10일(월) 오후 1시에 총신대학교 사당동캠퍼스 2층 세미나실에소 소집되었다. 이날 소집된 총신운영이사회는 제92회 총회를 앞두고 소집된 2007년도 정기운영이사회였다. 본 교단 총회는 직영신학교로 1967년에「학교법인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신학원」을 국가로부터 인가를 받고, 1969년에 4년제 대학교를 인가 받아 현재「총신대학교」로 운영하고 있다.「학교법인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신학원」안에「총신대학교」가 있다.「학교법인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신학원」이라는 법인이 있는데 이 법인을 우리는 보통 재단이사회라고 한다. 이 법인의 이사는 사립학교법에 따라 인선해야 하며, 교육인적자원부로부췅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학교법인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신학원」은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직영신학교이기 때문에 재단법인 이사를 포함해서 전국 노회에서 파송한 이사들과 함께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신학원 운영이사회」를 구성하여 학교를 운영한다. 이 운영이사회는 사립학교법이나 교육인적자원부와 아무 상관없는 이사회로 본 교단 총회에 소속된 이사회이다.
본 교단은 「학교법인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신학원」에서 운영하는 총신대학교와 신학대학원을 운영하며 이 과정은 교육인적자원캺로부터 학위 인정을 받은 과정이다. 그러나 비학위 과정인「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신학원」을 총신대학교 사회교육원 안에 3년 과정을 두면서 본 교단 목사를 양성하고 있다.
그런데 2007년 정기 운영이사회 때 보고된 내용에 의하면 총신대학교 학생은 1,664명, 대학원 231명, 신학대학원 1,129명, 선교대학원 186명, 교육대학원 152명, 사회복지대학원 89명, 상담대학원 78명, 목회신학대학원 125명, 총계 3,634명(등록대상자 수, 보고서 5쪽)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목회자 양성을 위한 총회신학원 재학생 수는 아예 보고도 없?다.
필자가 문제를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제91회 총회가 이사회에 위임한 사항은 편목 관련 문제와 총회인준신학교(신대원) 출신자 총신단축교회 관련건은 그동안 운영이사회에서 논의되어 시행되고 있음이 보고되었고 이 사실은 다음날 소집된 총회에 보고하기로 결의되었다.
그런데 나머지 총회가 위임한 4건은 그동안 이사회에서 진지하게 연구하였던가? 연구했던, 하지 않았던 다음날 총회에 보고는 해야 한다. 이때 이사 가운데 이경원 목사는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본 건은 총신 재정상 할 수 없으며 라고 총회에 보고하자.”
이런 식이다. 총회가 1년 전에 운영이사회에 위임했다면 운영이사회는 1년 동안 진지하게 연구하고 토론하여 총회가 위임한 사항을 결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총회 하루 전날 모여서 총회 보고용 문안만 작성하는 식의 운영은 과연 타당한가?
총회 임원회의 이야기를 해 보자. 제91회 총회(2006년)는 여러 긴급동의안 중에 본 교단 총회 역사적 정통성에 대한 문제가 안건으로 상정되었다. 그것은 1942년 제31회 총회록이 일본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과거 청산 차원에서 총회가 한글로 번역하여 번역룈의록을 채택해 달라는 건이었다. 일본어로 기록된 총회록이 번역을 했다면 그 번역된 회의록에 대한 공신력 때문에 총회가 채택을 해 주어야 한다. 제91회 총회록에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결의 되었다.
“신신우 씨 외 40명이 제출한 일본어로 기록된 1942년 제31회 총회회의록 번역의 건은 총회임원회에 맡겨 처리하기로 하다.”
이같은 총회 결의는 제91회 총회(2006년) 주요결의사항에 뽑일 정도로 중요한 결의였다. 그런데 이 건을 임원회가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제92회 총회에 보고한 임원회의 결의 내용을 보면 “일본어로 기록된 제31회(1942년) 총회회의록 번역 추진 건은 서기, 회록서기, 총무에게 맡겨 처리토록 한다.”(제92회 총회 보고서 81쪽)
이렇게 임원회에서 결의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총회 10일 전까지 총회 임원회와 담당자들은 제92회 총회에 보고할 번역물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 이후 한 번도 논의하지 못했던 같다. 필자가 너무나 답답해서 총회장(장차남 목사), 서기(박무용 목사), 총무(이치우 목사), 사무국장(천석봉 목사) 에게 전화를 걸어 왜 아직까지 번역이 안 이루어졌느냐고 물었다. 그때서야 문제의 심각성을 ?닫고 총회 임원회가 동분서주했지만 제92회 총회는 번역해서 감수했다는 보고는 없었다. 아무도 이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은 없었다. 번역하기로 제91회 주요결의사항으로 인정하면서 야단법석을 떨었지만 이 번역물은 물 건너 가고 말았다.
참으로 답답하다. 100억 원에 육박한 총회 예산 가운데, 총회 역사적 정통성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번역료는 단 한 푼도 책정하지 않는 총회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위임받은 당사자들의 과실 때문인가? 이런 이야기를 총회 어르신들께 하면 “돈 안 되는 일에 누가 전적으로 매달리겠는가놡라는 부정적인 이야기에 답답할 뿐이다. 우리 총회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금년 제92회 총회(2007년)에서 많은 사항들이 임원회에 혹은 각 특별위원회에 위임되었다. 1년 동안 뭐 그리 바쁘다고 이런 중차대한 일들에 관해서 무관심하다가 총회 개회 날이 가까이 오면 그때서야 부랴부랴 서두르는 것을 본다. 저렇게 해서 총회에 보고된 내용들을 누가 믿고 신뢰하겠는가?
제91회 총회(2006년) 임원들은 제31회 총회록(1942년) 번역 건에 관해 본 총회 앞에 사과해야 한다. 이 건이 본 교단 총회의 자존심을 지켜 나?는 문제였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장로회 역사, 헌법 연구소
소재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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